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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짧은 소크라테스 그리고 긴 질문들

정계피 2021. 8. 12. 02:11

나의 책장 한 켠에는 꽤 오래된 소크라테스 책이 있다. 너두? 나두!!! 학창 시절 몇 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뭔가 이해는 되지 않아 다시 책장에 꽂히기 일쑤였다. 그 뒤 가끔 책장을 둘러보다 '소크라테스'라고 진지한 궁서체로 쓰인 책등을 마주할 때면 "아 소크라테스! 조만간 봐야지"하며 읽기 희망 목록에 넣어두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거나 급히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소크라테스 위로 껴들곤 한다. 그렇게 읽기 희망 목록에는 언제나 있지만 뒷순서인 존재, 소크라테스를 이번에야 읽게 되었다. 책장의 소크라테스를 드디어 꺼냈느냐고? 아쉽게도 그건 아니고, 에릭 와이너가 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신간을 통해서다. 이 책은 여러 유명 철학자를 다루는데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챕터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 달랑 한 챕터, 41-78페이지까지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표지가 예쁘다!


번번히 실패했던 소크라테스 만나기가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 '에릭 와이너' 덕분이다. 그는 철학이라는 낯선 나라에 이제 막 도착해 어디로 갈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어수룩한 여행객을 가벼운 문체와 유머 위에 싣고선 부드럽게 출발한다. 어려운 용어나 개념 대신 쉬운 말로 설명하고 예시 또한 일상적이라 이해가 비교적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짧지 않은가. 이 책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세계를 얼마나 담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책에 담긴 내용 대부분은 이해할 만하다. "이만하면 소크라테스에 대해 꽤나 알게 되었군"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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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와이너의 노련하고 재치있는 글솜씨는 몇해전 경주에서 만났던 실력 뛰어난 문화관광해설사를 연상케한다. 연말 맞이 여행 중이었던 아내와 나는 불국사에 들렀다가 한 겨울 쌀쌀한 날씨 탓에 잽싸게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해설사를 만난 곳은 연화교, 청운교가 보이는 곳이었으니 이제 막 해설을 시작한 듯 했고 열 명 남짓의 관광객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뭔가 아쉬운 마음에 잠깐 들어볼까 했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다시 불국사 안으로 들어가 해설사가 가리키는 극락전 현판 뒤의 황금돼지를 보기 위해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열심히 빼내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을 넘게 다시 불국사를 돌고 나온 아내와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가이드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다. 에릭 와이너에게도 이 블로그를 빌어 엄지손가락을 남긴다. 썸즈 업,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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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를 어떻게든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소크라테스를 정원사에 비유하며 '마음 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 철학자'라고 설명한다. 책에 나온 예시를 옮겨오자면, 어느 이가 "저는 좋은 아빠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대체 좋은 아빠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갈 것이란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좋은 아빠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27개월 아이의 아빠이기에 이 부분을 읽으며 순간 기분 좋은 당혹감을 느꼈다. 입버릇처럼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가 생각하는 좋은 아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21년 초부터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일상의 풍경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것 투성인 사이에서 한 가지 좋았던 점은 가수 나훈아 씨의 라이브를 지상파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훈아 씨는 멋진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나훈아 : 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위의 예시에서 '좋은 아빠'를 '사랑'으로 바꾼 기출변형이므로 아마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 그 질문은 이상하네. 자네에게 사랑은 뭔가?

그럼 나훈아 씨는 자신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질문에 질문을 더해가며 깊이 파고들다보면 자신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마침내 '사랑이 왜 이런지' 발견하게 되겠지.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지만 답은 결국 자기 스스로 찾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얘기한 것은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라는 말인가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여러 질문들 역시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충분히 질문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더 정확하게 묻고 낱낱이 질문을 해체하다보면 몇 개의 질문들은 '아 나는 다른 질문의 잔상이었을뿐이었네'라며 홀연히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마침내 최후의 질문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소크라테스 외에도 루소, 쇼펜하우어, 간디, 니체, 몽테뉴처럼 이름만은 익숙한 여러 철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표지에는 느린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중절모와 둥근 안경을 쓴 한 사람과 긴 귀를 가진 강아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여행의 한 가운데인 듯 여유롭게 보인다. 나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천천히 무려 '철학'을 즐겨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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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재미(?)있게도 소크라테스가 직접 쓴 책은 없다고 한다. 다만 그가 남긴 말과 대화를 제자들이 정리해 전하는 것이란다. 그런 점에서는 동양의 철학자 공자와 비슷하다. 공자하면 떠오르는 ≪논어≫ 또한 공자가 쓴 책은 아니다. 공자의 말과 행동을 제자들이 기록해놓은 것이고 ≪논어≫ 내용의 상당수는 제자들의 눈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풀어놓은 것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더니 철학은 제자의 기록이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언제나 한결같은 아내의 당부를 매번 까먹는 나같은 사람도 있는데 스승의 그 많은 말들을 꼼꼼히 기억해낸 제자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