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살

[가게에서] 어르신의 서명

정계피 2021. 6. 12. 22:35

카운터에서 계산을 받다 보면 서명도 참 여러가지구나 싶다. 특이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서명은 하트그리기다. '하트', 그럴 때면 나는 속으로 식사가 영 형편없진 않았나보다 안심한다. 맛없는 식사를 하고 하트를 남기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웃는 이모티콘을 그리거나 '네'라고 대답하듯 서명을 남기는 예의바른(?) 손님들도 계시다. 나도 목소리를 높여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게 된다. 어느 분은 작대기 하나만 쓱하고 그린다. 그런 손님은 여지없이 영수증도 필요없다 하시고 홀연히 사라지신다. 때로는 서명의 내용이 아니라 서명하는 자세나 태도가 남다른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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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는 어르신은 족히 아흔은 돼 보이셨다. 이 나이대의 손님이 계산을 하는 일은 드물기에 어르신이 카운터 앞에 도착하셨을 때 나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계산하시려고요?"하고 여쭈고 말았다. 어르신은 "오늘 아들 밥을 사줘야 한다"며 낡은 지갑을 꺼내셨다. 주름진 손가락으로 지갑을 한참 뒤지시더니 주민등록증 뒤에 숨어있던 카드 한 장을 뽑아 내미셨다.

 

민증 뒤에서 카드를 꺼내는 광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 카드는 자주 쓰기에 바로 꺼낼 수 있는 쪽에 넣고, 개인 정보가 담긴 신분증류는 지갑 안쪽 꺼내기 힘든 위치에 넣어두니 말이다. 신분증과 카드가 같은 칸에 서식하는 것은 신나는 만화책과 두꺼운 백과사전을 책장 같은 칸에 꽂아두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아마 그 어르신에게 카드는 아주 가끔 어쩌다 꺼내보는 백과사전에 가까운 존재였으리라.

 

오랜만의 조명 세례에 쑥스러워 보이는 카드를 건네 받아 리더기에 꽂은 후 서명패드를 가리키며 서명을 부탁드렸다. 서명패드 옆에 꽂힌 펜을 든 어르신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써내렸다. 아마 당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서명은 내가 보는 포스 화면에 실시간 중계되었다. 일반 가게에서 사용하는 서명패드의 인식률은 얼마를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좋지 않아 서명하는 이가 제 아무리 명필이라도 패드를 거치고나면 두 살 아이가 장난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어르신의 정성 어린 서명 역시 '최신의' 서명패드을 지나자 까맣고 네모난 작은 점을 몇 개의 선을 따라 흩뿌린 것에 불과하게 된다. 어르신은 아셨을까? 당신이 쓰신 당신의 이름을 나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조차도 읽기 힘드실 거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어르신이 서명하는 모습에 잠시 감탄을 하였고 조금 질투도 하였다. 그 수많은 세월을 겪고도 여전히 무언가에 정성을 쏟을 마음을 남겨두셨다는 것에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반복되는 작은 일은 익숙해지면 으레 대충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거나 컵에 물을 따르거나 신발을 신고 벗거나 그리고 서명을 하는, 일상이라 말하기에도 사소한 일들 말이다. 치약을 정성스럽게 짠다거나 신발을 정성스럽게 벗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도 않고 글로 적으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드는 정도로 일상적이다.

 

그래서 어르신의 서명은 특별했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순간, 누군가는 휙하고 선 하나로 끝내버리는 일에, 그 결과물을 누구도 볼 수 없음에도 정성을 다하는 마음은 어떤걸까. 그 마음이 궁금해 다음번 서명은 잠시 시간을 들여 또박또박 써봐야겠다.

 

그러기 위해 미리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린다. 서명은 끝까지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종종 미처 펜을 떼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은 두 글자가 아니고 세 글자인데 서명 종료 화면이 뜨면 순간 황당하다. 거기에 대고 뭐라 하기도 쪼잔해보여 펜을 놓지만 분명히 기분은 좋지 않다. 그러니 나의 서명을 기다려달라. 나의 정성다함을 잠시나마 지켜봐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