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살

<며느라기> @멀티플렉스 추석

정계피 2017. 10. 19. 08:17

추석 연휴를 바로 앞둔 날 전세 계약을 마무리하러 아내와 부동산을 찾았습니다. 중개사분께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데 표정이 안 좋으시더군요. 붉은 눈시울에 한 손엔 휴지를 들고 계신 모습이 방금까지 울고 계셨던 거 같더라고요. 매번 뵐 때마다 밝고 활기찬 분이었기에 살짝 놀란 마음이 생기며 무슨 일이 있으신가 자연스레 걱정이 됐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건지 여쭤보니 중개사분께서 조심스레 하소연을 하시더라고요. 그 사연은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긴 스트레스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들만 셋인데 다른 아들네 며느리들은 바쁘다며 음식 준비를 하지 않아서 그동안 혼자서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게 억울하지만 마음이 약해서 누구한테도 말 못하고 속만 썩이고 계신 거였죠. 제 아내는 중개사분께 다른 아들들한테 강력하게 얘기해서 각자 집에서 음식을 조금씩 해오도록 하셔라 얘기했지만 중개사분은 어쩔 수 없이 제가 해야죠 하시더라고요. 이십년 가까이 해온 방식을 깨트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말 잘 듣는 며느라기'가 되기로 한 겁니다.


그렇게 연휴가 끝나고 부동산에 갈 일이 있어 들렀다 추석 잘 보내셨냐 여쭈니 딸 덕분에 이번 명절이 너무 행복했다며 웃으시더라고요. 딸이 친척들에게 음식 준비를 엄마 혼자 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고 친척간의 기나긴 카톡 회의 끝에 명절을 보내는 방식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렇게요. 


- 세 아들은 집에서 음식을 나눠서 준비하고, 아들과 손주만 시댁으로 간다. 며느리들은 각자의 집에 있는다. 


추석 전에는 무언가 바뀌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시어머니가 저기압이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보니 복잡하게 본인 살림 안 꺼내도 되고 본인도 음식을 하지 않으니 아들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 더 좋으셨다며 앞으로도 이렇게 하자고 하셨다네요. 말 잘 듣는 며느라기가 되어야 했던 중개사분의 20년 홀로 명절 상차리기가 끝난거죠. 그 마침표는 중개사분의 딸이자, 결혼을 앞둔 예비 며느라기가 찍은 셈이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확실히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며느라기'라는 낡은 앞치마를 두른 채 튀는 기름 맞아가며 일해야 했던 (남성들은 TV나 보며 술이나 마실 때 말이죠)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거죠. 지금의 30~50대가 추석이면 벌어지는 여성 노동력 착취를 '문제제기'하는 세대였다면 10~20대는 그러한 문제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세대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간 우리는 추석이면 벌어지는 여성에게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강요되는 가사 노동의 부당함을 이야기해왔지만 쉽게 바꾸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래왔고, 부모님의 부모님이,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렇게 해왔으니 이제와서 바꾸자고 하면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죠. 그래서 추석 부엌 풍경을 달리하는 일은 일종의 '혁명'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실제로 혁명이 실패로 끝나 반역자의 낙인만 찍힌 채 등으로만 울어야 했던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20대 자녀들은 더이상 어른들의 자리를 물려 받기를 원하지 않는 듯 합니다. 더이상 성姓이라는 요소가 추석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갈 배역을 결정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추석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참고기사] 

[시사IN] 나는 엄마처럼 안 살아.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중개사분이 딸이 보여주었다며 공유해주신 기사입니다. 위 기사에서 말하듯 ''엄마'라는 존재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강력한 수호자'였던 셈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로 따지면 시어머니는 악당, 며느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또 다른 피해자를 교육하는 수호자, 남자들은 쓸모없는 엑스트라 혹은 악당들이 기르는 살찐 애완견 정도랄까요. 이 오래되고 재미없는 영화 대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명절'이라는 멀티플렉스에 걸렸으면 합니다. 


201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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