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살

알맞은 힘으로 알맞게 일하기

정계피 2017. 10. 14. 08:18

4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고양이가 동거 중인 저희 집. 저는 꽤나 아침형 인간인 탓에 가장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편입니다.

서재로 가 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배경으로 스포츠 채널을 낮은 볼륨으로 틀어놓는 걸 좋아합니다. 치열한 승부의 현장을 고요히 보며 몽롱한 정신을 조심스레 깨우는 의식이랄까요?


요즘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포스트시즌 경기가 한창입니다.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딱히 응원하는 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투수가 공을 던지는 투구 동작은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지름 7cm 가량의 작은 공을 조금이라도 위력적으로 던지기 위해 한껏 몸을 구부렸다 일순간에 펼쳐내며 타자를 향해 공을 뿌리는, 일련의 투구 동작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좋아했던 투수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팀 린스컴 Tim Lincecum 입니다. 굉장히 역동적인 투구 폼을 가진 선수입니다. 타자에게 거의 등을 보여줄 정도로 몸을 뒤로 돌렸다가 앞으로 회전하는 동시에 다리를 찢을 듯이 앞으로 길게 뻗으며 공을 뿌립니다. 거기다 어깨까지 오는 장발이 손을 떠난 공을 따라갈 듯 앞으로 쏠렸다 다시 돌아가며 마무리, '찰랑'(♬ 아름다운 갈색머!리!) 절로 탄성이 나오는 광경입니다.


Tim Lincecum pitcht in slow motion from IFAMT® on Vimeo.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영상을 2008년과 2009년 2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는 괴물이었던 그였지만 엉덩이 고관절 부상 이후 예전만큼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습니다. (2016년 LA에인절스의 선발투수로 나와 총 9경기 38.1 이닝 동안 2승 6패. 평균자책 9.16을 기록) 팀 린스컴에 대한 얘기는 이쯤해두고. 


야구 한 게임은 총 9이닝, 그러니까 9번의 공격과 수비를 주고 받습니다. 한 명의 투수가 9이닝을 모두 던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는 2~3차례 투수가 바뀝니다. 선발투수 - 중간계투 - 마무리투수. 이렇게 역할을 나눠 던집니다. 선발투수는 가장 긴 이닝을 책임져야 하는데요. 6회까지 3점 이하의 점수를 주고 중간계투에게 공을 넘겨주면 '퀄리티 스타트 Quality Start' 의 요건을 갖추게 됩니다. 직역하자면 '꽤 좋은 시작'을 했다는 거겠죠?


선발투수의 중요한 덕목은 힘 조절입니다. 선발투수는 한 경기 90~120개 가량의 공을 던지게 되는데요. (초기에 대량실점하여 짤리지 않는다면요) 모든 공을 100%의 힘으로 던질 수는 없습니다. 상대가 뛰어난 타자이거나 위기 순간이라면 더 많은 힘을 들여 던지고 만만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면 조금은 힘을 빼고 던지죠.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로봇 타스가 유머 수치를 0-100까지 조절해야가며 대화하듯 말이죠. 이런 투수의 능력을 '완급 조절'이라고 합니다. 완급 조절을 잘 한다는 것은 힘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쓴다는 것이고 그럴수록 더 많은 공을 던지고 더 긴 이닝을 책임질 수 있겠죠.


완급 조절. 요즘 저의 관심거리이자 과제입니다. <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사량까진 아닌 밤들'을 견디다 건강 문제로 올해초 오래 다닌(혹은 버틴) 회사를 그만두었거든요. 매일을 강타자를 만난 선발투수처럼 힘껏 던지다 고꾸라진 셈이죠. 새로 찾은 지금의 일터는 규모도 작고 급여는 더 작지만, 선발투수처럼 제 나름의 완급조절이 가능해서 다행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선발투수 노릇이지만 배운 게 있다면 완급 조절을 잘 하려면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모든 일이 똑같은 무게로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일의 중요성을 따라 70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70의 힘을, 30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30의 힘을 쏟는 게 순리겠죠. 그래서 이 일이 얼마 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가용한 시간과 체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피고, 알맞은 힘으로 알맞게 일하는 걸 연습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실점은 내주는 대신 실책은 최소화하고요. 좋은 투수가 되어 감독에게 인정받고 팬들에게 사랑받는 그날까지 스스로를 응원해 봅니다.


2017.10.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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