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때로는 여행

청주 운보의집, 좋았기에 더욱 아쉬운

정계피 2017. 10. 13. 02:17

길었던 추석 연휴의 마무리는 평소와 조금 달랐습니다. 남쪽 바닷가인 고향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난생 처음인 어느 곳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 하늘이 아주 적당해서 아마 도로 위의 많은 귀경객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평소였다면 그냥 생각만으로 끝났겠지만 이틀하고도 반나절이나 남은 연휴가 저와 아내를 움직였습니다.


조금씩 답답해져가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청주였습니다. 아내는 난생 처음이었고 저는 대학교 시절 학회 MT로 청주에 사는 후배집에 놀러 갔던,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꺼내 아내와 나눴습니다. 남청주 톨게이트 근처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며 어디를 갈까 스마트폰의 화면을 뒤적여보았습니다.


상당산성, 국립청주박물관 그리고 운보의집. 1박을 하며 3곳 정도를 둘러보자 하였고 첫째 날은 야간 개장을 한 국립청주박물관을 둘러보고 둘째 날은 상당산성과 운보의집을 찾았습니다.


운보의집. 바보산수로 유명한 화가 운보 김기창(1914-2001)이 생을 마칠 때까지 노후를 보낸 곳입니다. 몇 채의 한옥과 정자, 연못, 미술관, 조각공원, 수석공원 등 규모가 상당하고 관리 또한 잘 되어있어 보는 내내 즐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후천성 청각장애를 가진 그가 어려움 속에서도 평생에 걸쳐 그려낸 미술 작품과 그의 흔적들을 살피는 동안 마음이 발갛게 채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돌아나오는 길에는 생각날 때마다 보려고 작은 화집도 구매했고요.


그렇게 다시 오른 귀경길. 아내는 운보 김기창에 대해 더 찾아보더라고요. 그러다가 그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걸 알게되었습니다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주제를 담은 작품을 여러작 남겼고 <적진육박>이라는 작품으로는 결전미술전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기도 했답니다. 결전미술전은 일제의 황국식민화정책을 찬양하기 위해 열린 미술 전시회입니다. 또, 친일 화가, 일본 화가들과 함께 친일화가단체인 구신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블로그 '줄리아의 친절한 미술관'의 포스팅(링크) 참고했습니다)


순간 좋았던 여행의 끝을 누군가 인정사정없이 밟아버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화집을 산 돈도 아까웠지만 운보의집을 둘러보며 기분 좋게 채웠던 마음이 일순간에 말할 데 없이 쓸쓸해졌고 배신감에 화도 났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아온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자라니요. 일만원 권에 그려진 세종대왕도 그의 작품이니 우리는 친일 부역자의 손에서 탄생한 화폐를 한 나라의 경제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많은 친일 부역자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것과 달리 운보는 90년대 들어 자신의 친일 부역 행각을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변명과 회피의 성격이 짙어 보입니다. 한참 부족한 반성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된다." - 경향신문, 1991.8.3.


"일제 말기 친일 활동을 한 사실에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일제때 활동한 사람으로 그 행위가 일본에 도움을 준 것이라면 나는 달리 변명하지 않겠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결국 용기 있고 떳떳하게 나아가지 못한 점은 이미 사죄해왔다. 그러나 사상적인 친일로 무장했다거나 일제의 정책에 적극 가담했다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결코 아니라고 단호히 부인하겠다. 인간은 살다 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내 행적 중에도 실수라고 생각될 부분이 물론 있을 것이다. 우리 화단이 앞 사람의 실수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 조선일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1993년경 (위 내용은 여행나그네가 운영하는 블로그 포스팅(링크)을 참고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예술가였다면 목 밑까지 쳐들어온 칼 앞에서도 내 한 목 정도야 하며 당당히 그들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요.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일제는 그런 예술가의 창작 욕구를 알기에 식민지를 문화적으로 파괴하는데 그들을 이용한 거지요. 참으로 교활하기 그지 없습니다. 일제 아래서도 꾸준히 항일 예술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분들의 삶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겠죠.  


일제 강점기가 남긴 깊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우리 사회 곳곳에 끔찍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길게 드리운 친일의 그림자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잰 걸음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합니다. 1945년 8월 15일 독립하여 광복光復을 맞이 했다지만, 우리는 그 빛을 아직 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광복의 빛은 더 커다랗고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으로 연휴의 끝이 무거웠습니다.


2017.10.13. 추석 끝.